不管怎样,最喜欢种植芭蕉的还是贵族文人。从描绘求礼云觉楼的《乌米东阁图》来看,舍廊的院子里可以看到大蕉。在描绘潭阳松水院的《松水院图》中,在祭月堂的左侧和松水院入口处可以看到一棵大蕉。金仁厚寄给松水院的48首诗之一是《适雨芭蕉》。
在描绘金祖淳家的《玉壶亭图》中,舍廊院子的尽头可以看到车前草。即使在描绘康津茶山草堂的《茶山草堂图》中,草堂后面的一块奇石旁边也种植了大蕉。除了金祖顺的玉湖亭以外,这些花园都还保留着,所以你总能找到它们。我去过Unjoru和Dasanchodang两次,Soswaewon也去过几次,但为什么我不记得看到车前草呢?可能是因为我路过时对大蕉没有清晰的印象。当我再次找到它时,我一定会去找车前草。
문인들이 글로 그려낸 아름다운 정원 풍경에도 파초는 빠지지 않는다. 다산의 서울 명례방 집 정원에도 크기가 방석만 한 파초가 한 그루 있었고, 이이엄(而已广) 장혼(張混)이 인왕산 옥류동에 그린 집 ‘이이엄’의 사랑채 왼편에도 파초 한 그루가 있었다. 이렇듯 문인들의 사랑채에 파초가 제격인 이유는 파초에 담긴 문취(文趣) 때문이었다.
글씨를 잘 썼던 회소(懷素, 당 나라의 승려이자 명필)가 집이 가난하여 종이가 없어서 고향 마을에 파초 1만 그루를 심어놓고, 그 잎에다 글씨를 연습했다는 고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백거이(白居易)가 “한가할 땐 파초 잎 뜯어다가 시 써서 읊는다(閑拈蕉葉題詩詠)”라 읊었듯이, 파초 잎에 글씨를 쓰고 시를 적는 것이 문인의 아취였다.
特别喜欢吟诵芭蕉的诗人徐居正说:“我的诗思奇特,清澈如水,所以我在芭蕉叶上写新诗。” )。作为描绘这种场景的绘画,可以引用李在冠的《番长杰西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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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在冠《芭蕉题诗图》制作年份不详,
纸本设色,37 x 59厘米,高丽大学博物馆藏
朴趾源(Yeonam Park Ji-won ) 是一位喜欢车前草的人,并称其为“心灵的朋友” 。延岩收到流亡灵海的李书九的来信后,说道。
[소창청기(小窓淸記)]에 의하면, 소리(聲)의 운치에 대해서 논하는 자들이 계성(溪聲)ㆍ간성(澗聲)ㆍ죽성(竹聲)ㆍ송성(松聲)ㆍ산새 소리[山禽聲]ㆍ그윽한 골짜기에서 나는 소리(幽壑聲)ㆍ파초에 듣는 빗소리(芭蕉雨聲)ㆍ낙화성(落花聲)ㆍ낙엽성(落葉聲)을 말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천지(天地)의 맑은 소리로 시인의 가슴을 울리는 것들이라 하였다.
我听到了小溪的声音,山谷里的水声,山谷里的风吹过的声音。每次去潭阳的乡间别墅,我常常把风吹竹子的声音误认为是雨声。我听见松风声和山鸟声。我用眼睛和心灵聆听花落叶落的声音。但还有一种声音我没有听过,是雨打在芭蕉叶上的声音。老作家非常喜欢这个声音。
住在高层公寓,窗边种芭蕉,听雨声,是不能指望的。当然,即使你像老作家那样把它种在花盆里看着它,你也听不到公寓里雨打在香蕉叶上的声音。
有一天,白雪皑皑,我参观了庆州的吉林寺,蹲在佛寺的屋檐下,久久地聆听着融化的雪花滴落的声音。或者,在相当遥远的一天,在我画了很久的老人家成为现实的那一天,我想尽情地听雨打在芭蕉叶上的声音。
정조(正祖), <파초도(芭蕉圖)>18세기, 종이에 수묵, 84.7×51.5 cm,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정조가 세손으로 있었던 시절에 섬돌 앞의 파초를 두고 쓴 시이다. 여름날 파초가 그 큰 잎을 펼쳐 무성한 녹음을 이뤄 그 그늘의 시원함을 만인에게 베풀듯이 이다음에 군주가 되면 성인의 정치를 펴보겠다는 정조의 포부가 담겨 있다. 정조가 그린 〈파초도〉도 남아 있다. 자신이 꿈꾸는 세상의 꿈을 간직하고 있으며, 자신의 덕성을 수양하고 지혜를 배양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화상이다.
세손 시절 정조는 파초 한 그루를 섬돌 곁에 심어두고 보았다. 궁궐의 정원에는 봄이 짙어져 간다. 이럴 때 파초도 땅속에 묻어두었던 뿌리에서 새잎의 대궁을 밀어 올린다. 정조가 파초를 사랑한 것은 사물의 외형을 보고 즐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호학(好學)의 군주답게 파초에 담긴 이치를 음미해야 한다고 여겼다.
탁물(托物)이란 마음이 지향하는 자세를 사물의 속성에 미루는 것이다. 정조는 탁물을 이 파초에 두었고, 자신의 수양과 지혜의 자료로 삼은 것이다. 파초는 잎이 지지 않으며, 먼저 나온 잎이 어느 정도 자라면 곧이어 늘 새로운 잎이 말려 나온다.
파초는 중심을 같이하고 한곳에서 나와 너른 잎이 여러 개씩 붙어 있다. 처음 잎은 말려 올라가다 활짝 펼쳐지고, 다시금 돌돌 말린 새잎이 돋아난다. 줄기에 붙어 자란 잎사귀는 마치 척추에 붙은 갈비뼈들과 같아 그 조리 참으로 치밀하다.
송나라 학자 장재(張載)는 이 파초의 속성에서 덕성을 잘 기르고 새로운 지혜를 배양하는 학문의 요체를 발견하였다. 그는 “파초는 속이 꽉 차면 새 가지를 펼치는데, 새 속이 돌돌 말려 언뜻 벌써 뒤따르니, 새 속 배워 새 덕을 기르기를 바라고, 이내 따른 새잎으로 새 지혜를 펼쳐내리(芭蕉心盡展新枝, 新卷新心暗已隨. 願學新心養新德, 旋隨新葉起新知)”라고 하였다.
웅화(熊禾)는 주(註)에서 “새 속으로 새 덕을 기른다는 것은 덕성을 높이는 공부에 해당하고, 새잎 따라 새 지혜가 펼쳐진다는 것은 학문을 말미암는 공부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정조도 또한 이런 의미로 파초를 보았을 것이다.
눈 속에 피어난 파초의 덕
한겨울 눈이 쌓이는 계절에 남방식물인 파초가 자랄 리 없다. 그러나 왕유(王維)는 눈 속에 생생하게 잎을 펼친 파초를 그렸다. 〈원안와설도(袁安臥雪圖)〉라는 그림이다. 원안(袁安)은 한나라 때의 사람이다. 큰 눈이 한 길 넘게 내려 민가(民家)에서는 식량을 구걸하고 있는데, 원안의 문 앞에는 사람 자취가 없었다.
낙양령(洛陽令)이 집으로 들어가 누워 있는 원안에게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원안이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모두 주리고 있는데 남들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낙양령이 그 말을 듣고 그의 품덕을 찬양하며 효렴(孝廉)으로 천거했다. 왕유는 이러한 원안의 맑고 고매한 정신세계를 표상해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왕유 이후 중국의 역대 화가들이 원안의 고사를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렸다. 장언원(張彦遠)은 파초 그림이 사실과 어긋난다고 말하였지만, 심괄(沈括)은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눈 속에 그려진 파초는 마음에 얻어서 손이 응한 것이요, 뜻이 이르자 바로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치를 만든 것이 신비의 경지에 들어가 천연의 아취를 깊이 얻었다. 이 경지는 속인들과 더불어 말하기가 어렵다”라고 한다.
그림은 정신으로 이해해야지 형상의 모습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눈 속 파초는 예술이란 불변의 법칙이 없고 형편에 따라 변화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율곡 이이는 원안의 고사를 자신의 고요한 본성을 지키는(守靜) 즐거움으로 평하였다.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 시절, 빈 관아에서 홀로 삼동을 날 적에 매화 화분 하나, 파초 화분 하나를 동반하였다. 우의정 김이소(金履素)에게 보낸 편지에 “옛사람 중에 매화를 아내로 삼은 이가 있었습니다만, 눈 내리는 날 푸른 파초는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될 만하더군요”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연암은 겨울의 파초를 통해 원안(袁安)의 덕을 닮으려 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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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의 벽화, <단비구도(斷臂求道)>
신광 스님이 달마 대사 앞에서 왼팔을 자르자 눈 속에서 파초 잎이 피어나 끊어진 팔을 받쳤다.
김해 신어산 동림사와 김제 금산사 대웅전, 순천 송광사에는 파초 그림이 있다. 젊은 신광 스님이 동굴에서 좌선하는 달마 대사 앞에서 예리한 칼을 뽑아 왼팔을 잘라버리자 눈 속에서 파초 잎이 솟아나 끊어진 팔을 받쳤다. 이는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로 [전등록(傳燈錄)]에 나오는 ‘단비구법(斷臂求法)’, 즉 팔을 잘라 법을 구하는 이야기이다. 파초는 왜 때 아닌 눈 속에서 피어났을까?
어느 해, 동짓달 초아흐렛날 밤새 큰 눈이 내렸다. 신광은 달마 대사가 면벽하고 있는 굴 밖에 서서 꿈쩍도 않고 밤을 지새웠다. 새벽이 되자 눈이 무릎이 넘도록 쌓였다.
“네가 눈 속에서 그토록 오래 서 있으니, 무엇을 구하고자 함이냐?”
“바라건대 스님께서 감로의 문을 여시어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해주소서.”
“부처님의 위없는 도는 오랜 겁 동안을 부지런히 정진하며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아야 얻을 수 있다. 그러하거늘 너는 아주 작은 공덕과 하잘것없는 지혜와 경솔하고 교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참다운 법을 얻고자 하는가? 모두 헛수고일 뿐이니라.”
달마 대사의 이 얘기를 듣던 신광은 홀연히 칼을 뽑아 자신의 왼쪽 팔을 잘랐다. 그러자 때 아닌 파초가 피어나 잘린 팔을 고이 받치는 것이었다. 그의 발심(發心)이 열렬함을 본 달마 대사는 혜가(慧可, 487~593)라는 법명을 주었다.
“그래,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
“마음이 심히 편치 않습니다.”
“편치 않다는 그 마음을 어디 가져와보라.”
“찾아보니 없습니다.”
“됐다. 그대 마음은 편안해졌다.”
이 안심(安心) 문답을 계기로 혜가는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혜가는 보리달마를 6년 동안 받들었으며 [능가경(楞伽經)]과 전법의 증표로 스승이 제자에게 전하는 가사인 신의(信衣)를 받았으며 중국 선종의 2대 조사가 되었다.
파초는 대승(大乘)의 십유(十喩: 모든 사물 현상에는 실체가 없으며 모두 허망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열 가지 비유) 중 하나이다. 십유는 취말(聚沫), 포(泡), 염(炎), 파초(芭蕉), 환(幻), 몽(夢), 영(影), 향(響), 부운(浮雲), 전(電)이다.
파초는 양파 껍질처럼 아무리 벗겨도 끝내 아무것도 남지 않아 불완전한 인간에 비유되었다. 파초의 체질이 견실하지 못하고 취약한 것처럼 사람의 몸도 허망하고 무상한 것을 가리킨다. 파초를 갈가리 찢어놓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람 역시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의(意)를 서로 갈라놓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덧없는 존재며 모든 생명체의 삶도 그렇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처음부터 주인이 없으며 모든 존재가 각각 주인이다. 식물은 한 뼘의 땅만으로 살아간다. 세상은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만이 의미 있으며, 결국 죽어 묻힐 내 키만큼의 땅이 의미 있을 뿐이다.
요즘처럼 화장을 하거나 수목장을 하는 세상은 그 땅마저도 의미가 없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라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됨을 본다.
1795년 윤2월 9일 이른 아침, 정조(正祖, 1752~1800)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으로 행차하였다.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지금의 수원 남쪽 화산(華山) 자락에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지었다.
그 후 정조는 매년 사도세자의 생신 무렵인 1월이나 2월이면 이곳을 방문했다. 그런데 정조에게 이날의 행차가 더욱 각별했던 것은 이해가 바로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 두 분의 회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임금의 행차라면 기본적으로 시위 군관과 의장이 수백 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날의 행차에는 이에 더해서 혜경궁을 시중하는 나인들과 회갑 잔치를 위한 행사 인원, 잔치에 참석하는 내ㆍ외빈까지 함께 갔으니 수행 인원은 6천여 명에 달했다.
물론 이들이 모두 함께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현지에 먼저 가서 준비하거나 길목을 지키고 대기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고 해도 어가 행렬은 어림잡아 1킬로미터는 족히 되었음직하다. 1백여 명의 악대가 연주하고 수백 개의 깃발이 펄럭이며 말과 가마가 줄지어 가는 행차는 당시에도 대단한 장관이었을 것이다.
만약 현재에 이러한 행차를 재현한다면 어떻게 기록할까? 아마 수십 대의 카메라가 동원될 것이다. 행렬을 따라가는 카메라, 임금을 클로즈업 하는 카메라, 관중의 반응과 주변 풍경을 담는 카메라는 물론이고, 대열 전체를 담기 위해 항공 촬영도 필요하다.
以这种方式拍摄的影片必须重新编辑并插入地图或图表,以在一定程度上传达游行的情况。然而,有一张图片将所有这些都放在一个宽度上。这是《华城图》的第七幅《国王回国阅兵图——花尾阅兵图》 (图1)。今天我们就来仔细看看它是如何被遏制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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图1 Kim Deuk-sin等人的《华城宫殿》第7卷《华阳的天堂》1795年左右
绢本设色,156.5×65.3厘米,三星美术馆Leeum收藏。
想要知道《花尾游行》是一幅什么样的画作,首先要简单说明一下这幅画所属的《华城画》八屏屏风的剩余宽度上画的是什么。因为因此,将这幅画称为“Wonhaengdo to Hwaseong”是正确的,但在本文中,为了方便起见,我将使用现有的名称“Hwaseongseongdo”)。
从这幅屏风的第一屏到第六屏,一一描绘了1795年华城举行的重大事件。首先,他画了总督惠庆公主60岁的生日宴会,以及为庆祝这一事件而举办的晚宴和考试。参拜神社、军事训练、射箭仪式等象征正祖文学生涯的主题也被采用。
然而,这幅折叠屏风的最后两块面板描绘的是一段路上的旅程,而不是一个具体的事件。第7幅是从水原出发经过始兴的游行队伍的场景,第8幅是在鹭梁津设置了贝达里渡过汉江的场景。其中,如果说最后一个面板是以Baedari为主题的话,那么本文将要讨论的第七个面板的独特之处在于它完全以游行场景为主题。游行不仅仅是往返首尔和华城的过程,它本身也是王陵中的一个关键问题。
以《开往华城的列车图》和《花车游行图》为例,比较一下奎章阁中保存的《开往华城的火车图》和《花车游行图》的设计元素(图2和图3)。19面旗帜紧随其后,由一名骑在马上的军官带领。七面旗帜,大方旗,左右一字排开,中间放置五面窄长旗帜。
대기치를 살펴보면 우선 도로를 정리하는 푸른색 깃발인 청도(靑道)가 좌우로 앞장선다. 이어서 두 가지 색이 반씩 칠해진 깃발이 등장한다. 진영의 네 모퉁이에 세워지기 위한 각기(角旗)이다. 네 개의 각기 사이에는 중앙을 상징하는 황문기(黃門旗)가 자리한다. 그 뒤로는 백호기와 현무기 그리고 주작기와 청룡기가 좌우로 각각 따른다.
반차도에는 희미하게 사신(四神) 문양이 남아 있는데, <환어행렬도>에는 좁은 지면 때문인지 문양 대신에 각 사신의 방위에 해당하는 사방색을 채워 넣었다. 의장기의 마지막에는 황색의 금고기(金鼓旗) 2기와 등사기(螣蛇旗)가 따른다. 금고기는 취타수를 지휘하는 깃발로서 ‘金鼓(금고)’ 두 글자가 적혀 있고, 등사기는 역시 지휘용 깃발로서 ‘나는 뱀’이 그려진다고 한다. 여기서는 반차도와 행렬도 모두 문양은 삽입하지 않았지만 황색 바탕에 붉은 언저리를 댄다는 지침은 지키고 있다.
이처럼 의장기의 대열을 자세히 비교하니, 반차도와 <환어행렬도>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이들 깃발의 모양과 색은 가까운 시기의 군정 서적인 [만기요람](1808)의 지침과 같다. 이는<환어행렬도>가 대단히 ‘사실적’으로 그려졌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행차의 모든 대열이 법식에 맞게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정조는 적법한 도열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시각 자료를 이용하였는가. <환어행렬도>의 사실성 이면에 있는 정조의 의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기초 자료가 되는 반차도에 대해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반차도는 맡은 소임과 신분(班)에 따라 차례대로 세운(次) 그림이라는 뜻이다. 의식이나 행렬 중에 참석자의 위치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시한 것인데, 행사 전에 대열을 점검하거나 행사 후에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제작하였다.
반차도가 정조대에 처음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이때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혁신 중 하나는 국왕의 도성 밖 행차와 같이 거대한 행렬을 처음 반차도로 정리하여 정식으로 삼은 것이다. 정조는 1795년 원행에 앞서 반차도를 들여오게 하고 여러 차례 연습하였다고 하니 정조의 철저함과 이에 부합하는 반차도의 효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정조대 반차도의 혁신 중 또 다른 하나는 행차의 현장감을 드러내기 위해 반차도에 새로운 도해(圖解: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이함)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현재 정조의 화성 원행을 기록한 반차도는 여러 본이 남아 있다. 그중 도해 방식이 크게 구별되는 두 종의 반차도를 비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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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화성원행반차도> ‘혜경궁의 가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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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도식>에 실린 <반차도> ‘혜경궁의 가교' 부분1796년,
책 크기 33.8×21.8cm, 규장각 소장
우선 앞서 살펴본 규장각 소장의 반차도는 전통적인 도법의 반차도이다(그림 4). 두루마리를 펴가면서 볼 때 행렬의 앞에서부터 점검할 수 있도록 대부분의 인물을 뒤에서 본 시점으로 그렸다. 단지 가마와 같이 옆에서 보아야만 그 모습을 온전히 알 수 있는 사물은 측면 시점으로 그렸다.
이처럼 후면과 측면이 복합된 시점은 자연스러운 장면을 연출하지는 않지만 대열을 파악하기에는 적합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반복되는 인물들은 도장으로 찍어냈는데, 이를 통해 이 반차도가 감상용이 아니라 실무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수록된 반차도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형식을 사용하였다(그림5). 인물을 모두 옆에서 보듯 겹쳐 그린 것이다. 보기에 자연스럽고 회화적이지만, 인물들이 겹쳐 있으니 실무용으로 쓰기엔 적합하지 않다. 의궤는 국가 행사를 치른 후에 관청에 두어 후대의 전범으로 삼기 위해 제작된 국가 기록물이다.
그러나 을묘년(1795) 화성 원행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이례적으로 101건이 출간되어 관청뿐 아니라 참석자들에게도 나누어졌다. ‘기록물’의 성격뿐 아니라 ‘기념물’의 성격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의궤에 수록된 반차도는 참석자들이 행차의 장관을 떠올릴 수 있도록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정조는 이처럼 행차의 실무적인 사전 준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후에 당시의 장관을 실감나게 기억하기 위해 반차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환어행렬도>는 새로운 형식의 반차도가 가졌던 시각적 효과에 시공간을 부여함으로써 더 현장감 넘치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전통적인 반차도에서 새로운 형식의 반차도, 그리고 <환어행렬도>로의 표현 변화는 이를테면 2D에서 3D로의 변화라고나 할까. 행차의 법식을 유지하면서도 현장을 더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열망이 <환어행렬도>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께 미음 다반을 올리기 위해 행차를 멈추다
<환어행렬도>의 대열은 반차도와 상당히 유사하지만, 그렇다고 반차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환어행렬도>는 특정한 시점을 상정하였는데, 바로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께 미음 다반을 올리기 위해 멈춰 선 시점이다. 화면 상단에 시위가 집중되어 있는 부분이 혜경궁의 가마가 위치한 곳이다(그림6).
그런데 실제로 미음 다반이 진상되었던 장소와 시흥행궁은 11리나 떨어져 있어서 그림에서처럼 행렬의 끝과 시흥행궁의 입구가 맞닿을 수 없다. 왜곡을 감수하면서 시흥행궁을 화면 안에 끌어들인 것은 미음 진상이라는 사건뿐 아니라 시흥이라는 장소가 이 행차에 특별한 의미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혜경궁에게 행차 중에 미음 다반을 진상한 곳은 모두 여덟 군데이다. 그중에서 특히 시흥행궁 주변을 배경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그림의 공간적 배경인 시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조는 을묘년 원행에 앞서 이미 여섯 번의 원행을 거행하였는데 시흥을 거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별히 장대해진 행렬을 수용하기 위해, 남태령을 거치는 좁고 험한 과천로 대신에 시흥을 거쳐 오는 평탄한 길을 새로 닦았다. 31리가 넘는 시흥로 상에는 중간 경숙처(經宿處)도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114칸에 이르는 시흥행궁이다.
<환어행렬도>에 시흥로와 시흥행궁이 포함된 것은 이들이 이번 원행을 위해 특별히 시행된 대규모 사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그재그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도로의 표현도 눈에 띈다. 도로를 주변 지세와 구분하여 표현한 것은 새로 닦은 시흥로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시흥로의 건설은 원행을 위한 일회성 공사가 아니었다. 시흥로는 장기적으로 수도권의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촉진하고자 계획되었다. 이는 공사를 마친 후 정조가 내린 조치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정조는 금천현감을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읍호(邑號)를 ‘금천(衿川)’에서 ‘새로운 흥성’을 의미하는 ‘시흥(始興)’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승격은 작업에 대한 포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오히려 시흥로의 건설이 애초에 시흥의 승격과 육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정조가 ‘시흥’뿐 아니라 시흥로 상의 많은 지명을 이처럼 개칭하고, 개칭한 지명을 돌에 새겨 길가에 세우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개칭된 지명은 ‘소사현(素沙縣)→만안현(萬安縣)’, ‘소황교(小黃橋)→황교(黃橋)’, ‘황교(黃橋)→대황교(大黃橋)’, ‘방축수(防築藪)→만년제(萬年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수수한(素)’ ‘작은(小)’ 등의 접두어 대신에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黃), 만(萬) 등을 사용하였다.
이는 시흥로를 명실공히 국왕의 행차로로 이름 짓는 과정이며, 이를 시각적으로 공표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비된 시흥로에서 정조의 행차를 보며 사람들은 시흥의 부흥을 곧 국왕의 위업과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았을까.
1744년 여름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은 서화수장(書畵收藏: 글씨와 그림을 수집함)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김광수(金光遂, 1696~1770)의 집 와룡암(臥龍菴)을 방문한다. 향을 피우고 차를 달여 마시며 서화(書畵)에 대해 논하던 중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 순간 화가 심사정(沈師正,1707~
1769)이 낭창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예정에 없던 일이다. 비에 흠뻑 젖은 그의 모습이 두 사람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这是米芾(米芾,1051-1107,中国北宋画家、书法家)的一幅水墨画,画中雨停满园山水花开。一直抱膝观望这一幕的沉思正突然大喊一声,找了一张纸,瞬间完成了一幅园林风景图。笔触有光泽,画面湿润美丽。金光国和金光洙回头看这幅画,发出赞叹之声。最终安排了一场小型的、朴素的酒会,三人玩得很开心后就分手了。
这一天,沉思正在金光洙家里画的一幅小画,被称为“卧龙岩小团”或“卧龙岩小志图” 。刚才还仿佛还滴着湿气的屏幕,生动地再现了雨后的优雅景象。
矮墙外,可见一棵粗大的松树,枝条长长。后面雾中矗立的一栋房子就是瓦龙加姆 (Waryongam)。Waryongam 这个名字来源于一棵树干粗壮的松树。坐在树荫下的一行人中,戴汤帽的是店主金光洙,前面戴帽子的两人是沉思正和金光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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